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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100년, 거대도시 서울에서 노동흔적 찾기](4)조국근대화와 서울노동 | 서울노동권익센터 / 2020.10.21 | |
1. 도시의 엔진은 ‘노동’ <응팔>의 덕선이 말하는 고도성장기 서울 드라마 <응팔>의 덕선이는 88서울올림픽 때 고2였다. 쌍문동 달동네를 무대로 한 드라마는 30년의 세월을 아스라이 되돌렸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1982년 여름 의욕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감춰진 도시빈민 여성의 삶을 드러내려고 했다. 조사연구팀은 독일에서 여성 사회학 박사과정에 다니던 손덕수 선생과 이화여대 사회학과 학생 7명으로 꾸려졌다. 조사대상 지역은 10여 년 철거광풍에도 밀려나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서울 하월곡동(미아4동)과 삼양동(미아6동)으로 잡았다. 바로 <응팔>의 주무대다. 이곳 서울 북동쪽 구릉지엔 14만여 명이 살았다. 당시 조사대상인 미아4,6동 주민 3만5천명 가운데 4,400명(12.5%)가 생활보호대상자였으니 가히 도시빈민 집결지였다. 조사연구팀은 지역교회와 빈민단체의 도움으로 연구설계를 마치고 1982년 7월 2주에 걸쳐 140가구(683명)를 대상으로 가정방문을 시작했다. 설문지와 인류학적 관찰을 겸했다. 조사결과는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민중사, 1983)로 결실을 맺었다. 책 서문엔 지은이의 이름이 없는 ‘하월곡동에 사는 12살 소녀의 시’가 실렸다. 전문은 이렇다. 울 엄마 이름은 ‘걱정’이래요. / 여름이면 물 걱정 / 겨울이면 연탄 걱정 / 일년 내내 쌀 걱정 짧은 시 한편에 모든 서울의 도시빈민 목소리가 담겼다. 계산하면 <응팔>의 성덕선이 이 조사연구가 있었던 1982년에 정확히 12살이다. 12살 아이는 1962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시작해 80년대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고도성장기의 서울을 웅변한다. “모두의 고도성장은 아니었다.”고. 책은 서울 도시빈민의 삶을 ‘6ㅂ의 악순환’으로 요약했다. ‘6ㅂ’은 ‘배움, 벌이, 방, 밥, 병, 빚’을 말한다. 확장하는 구로공단, 나쁜 일자리도 함께 확대 70년대는 1970년 11월 13일 동대문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으로 문을 열었다. 1971년 유니온세로판, 대륙아스타일, 한진상사, 국립의료원, 영창실업, 신흥염직 노조 결성에 이어 1972년엔 크라운전자, 태광산업, 한국모방(원풍모방 전신) 등에서 민주노조가 들어서자 다급해진 정부는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헌정 질서를 무너뜨렸다. 노동자들은 서슬 퍼런 유신정국에도 목소리를 냈다. 살인적인 노동조건이 그들을 움직였다. 특히 섬유업종은 장시간 저임금 노동의 대명사였다. 인촌 김성수가 1919년에 세운 제1호 민족자본인 경성방직은 30분 조기출근에 30분 연장근무를 시키면서도 늘 수당을 안줬다. 1973년 1월 469명의 노동자가 유노동무임금 해소를 당국에 진정했지만 돌아온 건 공포분위기 뿐이었다. 양평동의 대한모방은 장시간노동으로 악명 높았다. 월~금요일까지 하루 12시간 일하는데 점심 식사시간은 달랑 30분이었다. 무엇보다 주말 18시간 연속근무가 문제였다. 토요일 저녁 6시에 출근해 일요일 낮 12시까지 일하거나, 일요일 낮 12시에 출근해 월요일 새벽 6시에 퇴근하는 18시간 연속근무는 가혹했다. 회사 대표가 교회 다닌다고 기숙사에서 예배를 강요해 더 힘들어 했다. 오히려 양심적인 교회가 나서 강제예배 중단을 요구했다. 문래동의 동아염직에선 강제예배를 없애달라는 진정서 작성을 주도한 직원 정봉선 씨를 73년 1월 새벽 2시 엄동설한에 내쫓았다. 70년대 초 삼립식품 가리봉 공장엔 20살 전후의 어린 여공 2600여 명이 다녔다. 1973년 정부통계로 전체 근로자 월 평균임금은 2만 5,433원인 반면 월평균 소비지출액은 3만 6,600원이었다. 1973년 굴지의 삼립식품 3년차 여공 월급은 1만 8,057원에 불과해 소비지출은 물론 노동자 평균임금도 안 됐다. 그나마 이 노동자의 한 달 기본급은 6,524원에 불과했다. 연장수당 4,503원, 휴일수당 2,282원, 야근수당 3,030원, 월차와 생리휴가까지 반납하고 받은 수당 1,715원까지 합쳐야 겨우 1만 8천원에 도달했다. 기본급보다 3배나 많은 수당을 받으려면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장시간노동이 필요했다. 장시간 저임금을 참다못한 삼립식품 1천여 노동자가 1973년 9월 18일 집단파업을 벌이고 오전 9시부터 공장 건너편 야산에서 임금 50% 인상, 주휴일 실시, 12시간 연속작업 개선, 점심시간 확보를 요구하며 농성했다. 파업 3일째 회사의 약속을 믿고 공장에 들어갔지만 돌아온 건 쥐꼬리만한 임금인상과 주동자 13명 연행이었다. 1945년 10월 황해도 옹진의 작은 빵집 ‘상미당’에서 출발한 삼립식품은 지금은 파리바게뜨와 파리크라상, 베스킨라빈스31, 던킨도너츠를 거느린 SPC 그룹으로 급성장했다. ‘19시간 곱빼기 노동’ 없앤 해태제과 여공 70~80년대 노동운동의 꽃은 4년여에 걸친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다. 굴지의 제과업체 해태제과는 평일엔 주야 12시간 맞교대였다. 주말엔 19시간 장시간 곱빼기 노동에 시달렸다. 일요일 낮 12시부터 월요일 새벽 7시까지 19시간 연속해서 일하는 거다. 노조는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2,500여 해태제과 노동자 가운데 400여 명은 1976년 2월 8일 12시간씩 일할 테니 곱빼기 작업과 일요일만은 쉬게 해달라며 특근거부에 들어갔다. 회사는 특근 거부자들을 회유․협박하다가 강제로 끌고 가 작업을 강요했다. 닷새 뒤 한 외신에 해태제과 장시간노동이 보도되자 국제자유노련은 한국노총에 진상규명을 요청했다. 이렇게 일하고도 해태제과 6년차 여공은 기본급 1만 9천원에 제 수당을 합쳐 4만원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야간작업과 곱빼기 때 타이밍을 상용했다. 해태제과 여공들은 평일 12시간 쉬지 않고 일해 16,800개의 껌을 포장해야 일당 840원을 벌었다. 하루 평균 15,000~20,000개의 캔디를 싸다가 손에 피가 나 캔디 껍질에 묻었다. 손가락이 비틀어진 노동자도 많았다. 특근거부에 놀란 노조는 얼른 회사와 임금인상에 합의했다. 월 4회 주휴제 실시와 임금 30% 인상이었다. 합의는 합의일 뿐 휴일 곱빼기는 슬그머니 부활했다. 노동자들은 2~7월까지 특근거부를 계속한 끝에 주말 곱빼기를 없앴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3년 뒤 1979년 여름엔 주야 12시간 맞교대를 근로기준법대로 ‘8시간 노동’으로 단축하는 투쟁에 나섰다. 1979년 7월 4일 비스킷부 200여 명이 8시간 근무제를 요구하며 잔업을 거부하고 퇴근투쟁을 벌였다. 잔업 거부자가 늘어나자 회사는 어용노조 간부와 남자 직원을 동원해 폭력을 휘둘렀다. 1979년 8월 3일부터 9월 중순까지 매일 폭행이 일어났다.
8월 4일 새벽 4시 비스킷부 주임은 “8시간만 하고 나가는 ×들, 모가지를 비틀어 놓겠다”고 욕하며 비스킷부 이복례 등 여공을 주먹으로 때렸다. 회사는 8월 8일 새벽엔 안양 3공장에서 남자노동자 100명을 실어와 여공들이 퇴근하는 문을 철사로 묶어 버렸다. 남자들은 여공을 끌고 나와 발효실에 가두거나 화장실에 몰아넣고 못 나오게 했다. 8월 10일 새벽 4시에도 껌부 A조 남자기사 이한본이 퇴근하려는 김추련을 짓밟았다. 8월 12일 새벽 4시 퇴근하려는 비스킷부 A조를 막아서며 “북한 갈 ×들”이라 욕하며 때렸다. 여공들은 폭력을 휘두른 남자기사와 회사간부 명단을 공개하고 고발했다. 지학순 주교가 9월 7일 해태제과노동자폭력사태대책협의회를 구성하고 불매운동으로 압박하자 회사는 8시간 노동제를 수락했다. 여성노동자들이 동료 남성노동자에게 맞으면서 힘겹게 따낸 ‘8시간 노동제’ 때문에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혜택을 누렸다. 소외된 노동, 더 큰 스피커를 찾아서 1978년 7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9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그해 12월 12일 치러진 총선에선 신민당이 집권 공화당보다 전체 득표에서 1.1%나 앞서 민심이 돌아섰다. 70년대 말 노동계는 동일방직, 원풍모방, 방림방직, 삼원섬유, 남영나일론, 진로, 해태제과에서 100여 명의 해고자가 속출했다. 대통령 선거전이 불붙은 1978년 3월 20일 저녁 종로5가 기독교회관 9층 기독교방송사 보도국에 젊은 여성 30여 명이 들이닥쳤다. 동일방직, 원풍모방, 방림방적, 진로주조, 해태제과 해고자들이었다. 이들은 노동보도를 안 하는데 항의하며 생방송을 일시 중단시키고 방송국장 면담을 요구했다. 기자들은 “배우지 못한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하며 소리쳤다. 노동자들은 “광릉에 크낙새가 죽으면 크게 보도하면서도 노동자가 죽어가도 거들떠보지도 않느냐? 사람 목숨이 새만도 못하냐?”고 항의했다. 언론은 1977년 3월 7일 광릉숲에서 천연기념물 크낙새 한 마리가 야생동물에게 물려 죽자 1년 가까이 주요 뉴스로 다루면서도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과 해고는 외면했다. 이 사건은 유신정권의 탄압과 상업주의, 기자들의 투항주의로 비판과 견제기능을 잃은 한국 언론에 경종을 울렸다.
6일 뒤 소외된 여성노동자들은 더 큰 스피커를 찾아 나섰다. 개신교 교단이 1978년 3월 26일 새벽 5시반 여의도광장에서 신자 45만명을 모아놓고 부활절 연합예배를 했다. 새벽 5시 43분 목사의 기도소리가 멈췄다. 잠시 뒤 스피커에선 “노동3권 보장하라, 동일방직 방림방적 해결하라”는 여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여성노동자 6명이 단상을 일시 점거했다. 보안요원들이 여공을 난폭하게 때리며 끌어내렸다. 여공들은 끌려가면서도 “우리도 인간이다. 박 정권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5분 정도 중단된 예배는 예정대로 계속됐다. 여성노동자가 대규모 종교행사에서 노동문제를 직접 호소하고 정권퇴진을 요구한 역사상 유래 없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의 결정판이었다. 남영나일론 2명과 동일방직 삼원섬유 원풍모방 방림방적 1명씩 모두 6명의 해고 여성노동자가 함께했다. 검찰은 이들의 공소장에서 박정희 정권 퇴진 요구는 뺐다. YH 여공, 유신에 종말을 고하다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1천여 경찰이 YH무역 여공들이 농성중인 마포 신민당사 4층 강당으로 뛰어들었다. 여공들은 울부짖었다. 신민당 박용만 의원과 취재기자들도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 나왔다. 진압은 23분만에 끝났다.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YH무역은 직원 10명짜리 가발업으로 시작해 4년만에 4천명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노동자들은 1975년 일당 220원의 저임금에 수시로 불법해고와 부당전직 전출, 감봉을 당했다. 노조를 만들고 지키는 과정도 험난했다. 회사는 무리한 투자를 계속했다. 1977년 은행 빚으로 오리온전자를 인수하고 새한칼라 주식 44%나 사들였다. 고용도 1970년 4천명에서 1977년 1800명, 1978년 500명으로 격감했다. 급기야 회사는 1979년 3월 29일 4월말로 폐업을 공고했다. 장 회장은 미국에서 호화주택과 빌딩을 짓고 목장과 백화점, 방송국을 가졌는데 그 돈을 벌어준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날 판이었다. 여공들은 1979년 4월부터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중랑구 면목동에 위치한 공장은 너무 외진 곳이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8월 9일 새벽 여공 180여 명이 경찰의 눈을 피해 조용히 공장을 빠져나와 마포 신민당사로 숨어들었다. 공덕역 인근 신민당사는 대로변이고 외신기자들도 많아 그 만한 농성장소가 없었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은 유신정권은 YH무역 김경숙의 죽음으로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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