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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100년, 거대도시 서울에서 노동흔적 찾기] (3)해방전후 폭발과 오랜 침묵 서울노동권익센터 / 2020.10.05

[근대 100년, 거대도시 서울에서 노동흔적 찾기](3)해방전후 폭발과 오랜 침묵

 

 

 

 1. 도시의 엔진은 ‘노동’
 2. 일제강점기 서울노동사
√ 3. 해방전후 폭발과 오랜 침묵
 4. 조국근대화와 서울노동
 5. 21세기와 서울노동

 

#1. 노동자 외면한 제1,2 공화국 노동운동

1945년 해방과 함께 찾아온 미군정 3년은 짧았지만 한국 노동운동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45년 11월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미군정청 노동부 발표로도 1946년 11월 1,179개 노조에 30만 명의 조합원이 가입했다. 우익노동단체는 1946년 3월 결성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한국노총의 전신)이다. 대한노총은 노동자가 아닌 우익 반공청년단체가 미군정의 강력한 후원 하에 움직였다.

해방 직후 좌우 대립과 궤를 같이 하면서 전평과 대한노총은 격렬하게 싸웠다. 전평이 1946년 9월 철도를 시작으로 파업에 들어가자 미군정과 대한노총은 이 파업을 함께 파괴했다. 전평이 1948년 2월, 5월 파업을 끝으로 소멸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48년 5.10 선거를 적극 지지한 대한노총이 이후 유일한 노동단체로 남았다.

48년 수립된 이승만 정부의 초대 사회부장관(지금의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를 합친 개념)으로 전진한 대한노총 위원장이 입각하자 장관직과 노총위원장직 겸직을 놓고 대한노총 내부갈등으로 혼란스러웠다.

해방 이후 5년 동안 노동계는 좌우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노동자를 위한 일을 제대로 못했다.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봄에서야 노동법을 제정했다. 1953년 3월 8일 노조법과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만들고 1953년 5월 10일 근로기준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법을 모방했을 뿐 우리 실정에 맞는 노동법은 아니었다. 변변한 산업도 없이 전적으로 원조에 의존했던 이승만 정부 하에서 노동자를 위한 배려는 거의 없었다.


노동절 기념행사 뒤 경무대로 이승만대통령을 방문한 대한노총 간부들 ⓒ 한국노총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먼저 지식인 노조 결성이 두드러졌다. 교원노조와 언론사노조, 금융권 노조가 60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교원노조가 전국조직으로 출발했고, 1960년 5월 대구일보, 6월 연합신문, 평화신문에서 노조가 결성됐다. 그러나 유력 일간지로 파급되지 못했다.

금융노조는 제2공화국 때 지식인 노조로 가장 순조로웠다. 1960년 6월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과 대한증권거래소, 제일생명보험에서 노조가 결성돼 그 힘으로 금융노조연합회도 만들었다.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고 1960년 9월엔 단협도 체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61년 군사 쿠데타로 노동운동은 6~7년 정도 암흑기를 맞이한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 직후인 1961년부터 ‘노조 재조직’에 들어갔다. 1961년 10만명이었던 한국노총(대한노총에서 개명)은 1차 경제개발 5개년이 끝나는 1968년 40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렇게 노총 조합원은 늘었지만 군사정부는 노조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포섭했을 뿐 노동자를 위한 조직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2. 노동조건 개선하려 노조 만들면 곧바로 해고

군사정부가 경제개발을 목표로 내걸었던 60년대 서울지역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 노조를 만들어 점차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요구는 노조 결성과 동시에 해고를 낳았다.

60년대 서울지역 노동자들도 대부분 새로 만든 영등포 구로공단이나 동대문 주변 공단에서 일했다. 이들 제조업 노동자와 함께 60년대엔 사대문 안쪽 서울 도심에서 사무직 노동자들도 노조결성에 나섰다. 외자도입을 적극 추진한 군사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 따라 외국계 기업 노동자들도 서서히 노동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종로구 장사동 13번지에 있었던 조광섬유는 1962년 12월 직공들이 노조결성 움직임을 보이자 주동자 6명을 감금하고 때린 뒤 해고했다. 조광섬유는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 장시간 노동을 시켰다. 영등포구 신도림동 627번지 미왕산업사도 1962년 7월 노조를 만들자마자 5명을 부당해고 했다. 1년 뒤 회사는 미왕산업(주)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 종업원 250명을 해고했다. 미왕산업은 (주)미원을 거쳐 오늘날 대상그룹으로 발전했다. 영등포구 문래동 동양기계공업도 1964년 7월 노조결성 하루 전에 주동자 17명을 집단해고했다. 미국계 전자부품사인 영등포의 시그네틱전자공업도 1967년 9월 노조가 생기자마자 미국인 사장이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기획원(지금의 기획재정부)에 노조해산을 요청했다. 일본항공(JAL) 서울지사도 1967년 10월 노조가 생기자 지점장이 해산을 강요하며 직원들을 폭행했다.

#3. 고도성장 후유증 60년대 말부터 시작

제3공화국은 으레 해마다 10% 이상 고도성장 한 걸로 안다. 그러나 1차 경제개발 5개년이 끝나는 68년부터 한국경제는 위기에 처한다. 63년 외자도입으로 경제개발을 시작했지 급격히 늘어난 외채를 또 외채로 메워야 했다. 2차 경제개발 5개년(1968~1972) 때 신규 차관도입이 지연되면서 부실기업이 속출해 경제성장률은 주춤하고 곳곳에서 임금 삭감과 체불이 속출했다.

1970년대 초반 외채누증과 신규 차관도입 부진으로 부실기업이 속출해 박정희식 성장모델은 위협받았다. 영등포 구로공단과 동대문구 외곽에 몰려 있던 서울의 노동자들은 군사 정권을 상대로 임금삭감에 적극 항의했다.

1970년 1월 광진구 광장동에 있던 한미합작 제약회사 ‘한국화이자’에서 260여명의 노동자가 해고자 복직과 노조인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여성 노동자들은 두 달 동안 싸워 노조를 인정받았다. 한국화이자노조는 외국인투자기업과 제약업계 최초의 노조결성으로 이후 종근당, 유한양행, 국제약품으로 이어지는 1970년대 제약업계 노동운동에 선도자였다.

1970년 3월엔 조흥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이 임금인상 파업직전에 합의했고, 6월 15일엔 한일나일론이 임금인상 쟁의에 들어갔다. 서울대병원과 국립의료원 간호사도 9월 25일 처우개선 요구하며 파업했다.


광진구 광장동에 있었던 한국화이자 공장. 최근 아파트가 들어섰다. ⓒ 의협신문

#4. 박정희 성장모델의 위기와 전태일 분신

시작부터 끓어올랐던 70년대 노동운동은 1970년 11월 전태일 분신과 1971년 3월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당시 23) 피살이란 극단적 사건을 낳았다.

영등포구 신대방동 487-1에 있던 한영섬유 노동자들은 1970년 12월 20일 노조를 만들었다. 회사는 곧바로 노조원 200명을 해고한 뒤 재입사시켜 조합원 자격을 박탈했다. 공장장은 젊은이 3명을 회사에 입사시켜 노조파괴에 나섰다. 셋은 1971년 3월 18일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고 들어와 열성노조원 김진수(23)에게 시비를 걸고 노조 탈퇴를 강요하다가 항의하는 김씨의 머리를 드라이버로 찔렀다. 혼수상태에 빠진 김씨는 두 달 만에 숨졌다. 범인 중 2명이 양심선언하면서 회사의 노조파괴 전모가 드러났다. 1971년 6월 25일 김씨의 장례식엔 200여 노동자가 모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1970년 11월 25일엔 조선호텔 노동자 이삼찬(30)이 호텔 구내에서 휘발유 병으로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갓 결성한 노조가 위원장 행방불명으로 해산 당하자 격하게 항의한 것이다.

IC(직업회로)를 조립하는 구로공단 아이맥전자는 물량에 따라 집단해고와 채용을 반복했다. 아이맥전자 노동자들은 71년 2월 밀린 임금을 요구하며 노조를 만들었지만 회사는 해고와 직장폐쇄로 맞섰다. 노동자들은 4월 8일 동료의 복직을 요구하며 공장에서 농성에 들어간 끝에 노조 인정과 밀린 휴업수당을 받았다.

재일교포 갑부가 박정희 대통령과 손잡고 구로공단에 세운 방림방적에선 1971년 9월 15일 1천여 노동자가 밀린 임금을 달라며 농성했고, 11월 1일 새벽엔 성북구의 삼선교통 차장 57명이 체불에 항의해 시청 앞에서 농성했다. 군사정부는 시내버스 여성 차장들의 새벽 2시 서울시청 앞 농성에 적잖이 놀랐다.

성북구 정릉동 영창실업 노동자도 71년 11월 노조를 만들었고 구로공단의 크라운전자에도 1972년 1월 노조가 만들어졌다.


삼선교통 차장들의 시청 앞 농성을 보도한 동아일보 1971년 11월 1일자 7면

#5. 성수공단, 서울 외곽 열악한 공단노동의 대명사

70년대 성동구 성수동은 거대한 공장지대였다. 당시 성수공단엔 섬유업을 중심으로 4~5만 명의 노동자가 200여 공장에서 일했다. 성수공단엔 노동조건이 특히나 열악했다. 200여 공장 중 노조 있는 곳은 태광산업이 유일했다.

성수동 282-84번지에 있던 태광산업은 부산에 1공장(3천명)을 두고 양복지 피죤텍스를 만들고, 울산 2공장(2천명)에선 비둘기표 엑슬란 실을 뽑고, 서울 성수동 3공장(650명)에선 쉐터(요꼬)를 짰다.

태광산업 성수동 3공장 위생시설은 엉망이었고 노동조건도 나빴다. 8시 출근해 밤 10시까지 일했고, 새벽 2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퇴직금은 아예 없고, 한 달 중 유급휴가는 하루도 없었다. 이들에게 근로기준법은 휴지조각이었다.

1972년 6월 견디다 못한 태광산업 성수동 공장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 회사는 ‘자치회’라는 구사대를 만들어 노조파괴에 나섰다. 남성 노동자로 이뤄진 자치회는 여성 노조원들을 감금하고 때렸다. 여성 조합원 300여명은 자치회 간부들에게 시달려 힘들게 버텼다. 옷을 만들던 태광산업은 90년대 유선방송 사업에 뛰어들어 티브로드라는 계열사를 두고 있다.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던 신흥염직엔 1971년 12월 7일 노조가 들어섰지만 회사는 한 달 만에 노조원을 매수했다. 원풍모방의 전신이었던 한국모방 노동자들은 탄압을 견디다 못해 1972년 10월 명동성당 농성 끝에 민주노조를 세웠다.

고도성장하던 한국경제가 1970~71년 주춤하자 제조업과 외투기업, 은행, 공공병원, 버스 등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시내버스 여성 차장들의 서울시청 앞 농성이나 한국모방의 명동성당 농성 등에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두려움을 느낀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단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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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