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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100년, 거대도시 서울에서 노동흔적 찾기] (1) 변화하는 도시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서울노동권익센터 / 2020.10.05

[근대 100년, 거대도시 서울에서 노동흔적 찾기] (1) 변화하는 도시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1. 도시의 엔진은 ‘노동’
 2. 일제강점기 서울노동사
3. 해방전후 폭발과 오랜 침묵
 4. 조국근대화와 서울노동
 5. 21세기와 서울노동

 


 

#1. 도시, 변화의 엔진이며 촉진자

<뉴욕의 야경 / imagetoday>

인류는 1만 년에 걸쳐서 도시를 건설해왔다. 도시는 변화의 엔진이고 촉진자다.
세계 경제의 거인, 뉴욕의 힘은 항구에서 나왔다. 미국 동부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폭포선을 따라 지금도 오거스타, 리치먼드, 조지타운, 볼티모어, 윌밍턴, 필라델피아, 트렌턴 같은 현대 도시들이 번창한다.


도시의 집중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 전후방 연계효과를 노리고 고객들과 가까이 있으려는 기업들의 노력이다. 둘째 노동력의 공유다. 특정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은 자기 기술을 사줄 기업들 가까이 있는 게 유리하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은 그런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 가까이 있는 게 유리해서다.


도시는 정보의 전달자이자 처리자다. 도시는 바로 이런 혁신 과정에서 절대적 역할을 하는 정보 확산의 마술 속에 지속적 성장을 도모한다.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은 “기업이 유능한 노동자를 쉽게 접하기에 도시만한 게 없다”고 했다.


#2. 변화하는 도시에 정체성을 더하는 사람들

<“Author and activist Jane Jacobs at a community meeting in Greenwich Village’s Washington Square Park in 1963”,
 Photograph: Fred W McDarrah/Getty Images>

뉴욕은 2차 대전 이후 급진 사회운동을 꽃피웠다. 처음 뉴욕은 대기업보다 중소산업으로 도시의 노동자를 부양했다. 1929년 대공항 무렵부터 뉴욕 집권자들은 탈산업화 정책을 통해 중소산업을 쫓아냈다. 맨해튼을 중심으로 뉴욕은 금융과 서비스, 고급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중소산업이 쫓겨난 공장과 창고 등엔 예술가들이 살면서 작품을 제작하는 소호가 생겨났다. 도시는 이렇게 획일화에 저항해왔다.


자동차 면허가 없는 사람은 미국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뉴욕은 예외다. 맨해튼 남쪽에서 시작하는 ‘걷는 시가지’는 북쪽까지 이어진다. 파리에서 서민을 몰아낸 도시개발의 전제군주 오스만 남작처럼 오늘날 뉴욕을 만든 로버트 모제스(1888~1981)는 1930년대부터 뉴욕에 막무가내로 ‘자동차 교통’을 도입해 서민들을 몰아냈다. 모제스는 사람들만 몰아낸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공동체도 함께 부쉈다.


그러나 시민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1964년 중국계, 이탈리아계, 유대계, 갱, 일반 시민들이 공동전선을 결성했다. 덕분에 맨해튼의 다운타운은 자동차를 막아내고 지금처럼 무사했다. 이 싸움은 도시 사상가 제인 제이콥스가 이끌었다. 그녀가 뉴욕을 살려낸 셈이다.


‘석유=자동차 경제’가 통제하는 미국은 언제나 뉴욕을 호시탐탐 노렸다. 오늘날에도 맨해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쇼핑몰로 바꾸려 하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가 ‘자동차 도시’이지만 뉴욕이 지금까지 ‘보행자 도시’로 남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싸운 결과다. ‘노동’이 사라진 도시는 죽은 도시다.


#3. 숨 가쁘게 변신했던 서울의 100년, 그 뒤안길의 노동


인구 천만의 거대도시 서울은 어떨까?

<건축 중인 세운상가, 1967 / 서울사진아카이브>

서울은 조선 초기 성리학에 입각한 인구 30만 명을 예상한 계획도시로 출발해 조선 후기에 와선 상업도시로 변했고, 개항을 거쳐 일제강점기엔 식민도시로, 해방 이후엔 고도성장 도시로 바뀌었다. 오늘날 도시 재개발은 미래의 서울을 또 어떤 모습으로 바꿀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빠른 성장에 익숙해져 전면적 파괴와 개발논리에 너무 쉽게 순응한다. 불과 반세기 전 서울의 라데팡스를 꿈꾸며 삼일빌딩과 세운상가를 세웠지만 흉물로 변했다. 60년대 강북 개발은 강남개발로 무색해졌고, 다시 돌고 돌아 강북 뉴타운과 한강, 청계천 복원으로 되돌아왔다.


<서울의 야경 / imagetoday>

유럽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늘 “미국보다 더 미국 같다”고 말한다. 광화문 도심과 강남대로의 마천루는 중구난방 어지럽게 널려 있다. 서울의 근대화 100년 동안 밀려나고 숨어버린 노동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4. 여성 노동자, 궁녀

<윤비와 나인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늘날 아파트 경비노동자는 대부분 간접고용으로 24시간 맞교대 하면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한다. 조선의 궁녀는 지밀나인을 제외하곤 3교대 근무로 비교적 여가시간이 많아 바느질과 글씨 연습으로 시간을 보냈다. 둘 다 공공서비스를 담당하지만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뉜 정규직 단일호봉체계였다. 처음 나인이 되면 쌀 4말과 콩 1말 5되, 북어 13마리를 받았다. 월급은 노동강도에 따라 달랐다. 힘든 일을 많이 하는 무수리는 쌀 6말을 받아 신참 나인보다 2말을 더 받았다. 더 험한 일을 하면서도 더 낮은 임금을 받는 오늘날 여성노동자와 많이 다르다. 사극과 달리 무수리는 대부분 출퇴근하는 노동자였고, 결혼도 했다.

#5. 조선후기 실학을 꽃피운 노동자, 중인

<“수계도권”, 유숙(1853作) /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동쪽 북촌 양지바른 곳은 명문세족이 모여 살았다. 조선후기 북촌엔 정치권력을 도구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사치와 문화를 독점했던 노론의 집성촌이었다. 왕족과 문벌 양반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직선의 북쪽인 계동, 가회동, 원서동, 안국동, 재동 같은 북촌에 주로 살았다. 지금의 충무로 위쪽 남산 자락엔 몰락한 남인 출신 양반들이 살았다.


중인들은 청계천과 인왕산(누상동, 누하동) 일대에 많이 살았다. 청계천엔 역관과 의원, 상인 등 재산이 넉넉한 중인이 살았고 인왕산엔 주로 궁궐로 출퇴근 하는 서리나 아전 같은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이 살았다. 지금의 통인시장에서 인왕산에 이르는 지역에 기술직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다.


<수선전도 / 서울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한양도성전도/ 한양도성가이드북>

노론 집권층만 문화를 향유한 건 아니다. 기술 노동자였던 중인들도 조선후기에 와선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는 “정조의 르네상스를 만든 건 사대부가 아니라 ‘중인’이었다”고 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


아마도 우리 역사를 통해 노동자가 가장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던 시기가 정조 때다. 조선의 사대부는 문사철(문학과 역사, 철학)을 겸비한 르네상스적 인물이지만, 1년에도 몇 번씩 관청을 옮겨 다녀 실무에 능할 수 없었다. 결국 해당 관청의 실무는 중인 노동자들이 맡아 처리했다. 조선후기 실학은 이들 중인 노동자들이 꽃피웠다.


#6. 일제강점기,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과 용산으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촌과 청계천에 모여 살던 노동자들은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과 용산 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1898년 한성전기회사는 동대문 바로 옆에 화력발전소를 세웠다. 1899년 5월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서울에 전차가 놓였다.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운행했다. 이렇게 동대문 일대는 서울의 배후공단이 됐다. 동대문 밖 신설동엔 대규모 방직공장과 고무공장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 동대문은 대규모 공단이 됐다. 1925년 동대문구 신설동엔 당시 조선 최대의 공장이었던 종연방적주식회사가 들어섰다. 일본 최대의 섬유업체가 신설동에 300명 규모의 공장을 세우고 옷가지를 생산했다. 1926년엔 동대문 남쪽 신당동에 경성고무공장이 들어섰다. 그보다 앞서 서울고무도 동대문에 설립됐다.

<종연방적 파업을 주도했던 이효정 / 여성신문, ‘노동운동으로 일제에 맞선 경북 여성독립운동가’, 16.12.7,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계연구부장>

청계천과 을지로 5가 훈련원공원엔 판자촌과 토막집이 들어섰다. 토막은 신석기 시대 움집과 비슷했다. 이곳에 사는 10대 여성노동자들이 동대문 일대 공단노동자가 됐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제사공장 여공들은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 실을 풀다보면 살갗이 벗겨지고 온 몸은 땀범벅이었다. 이들은 온종일 고된 노동과 욕설, 체벌에 시달렸다. 1920~30년대 동대문 일대 서울고무와 종연방적 파업은 이들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었다. 남성노동자들은 주로 지게꾼이나 인력거꾼이 되거나 동대문 남쪽 채석장(지금의 낙산공원)에서 일했다. 그도 아니면 용산 쪽 철공소에서 일했다.

<홍순태 작가가 찍은 1969년 서울 창신동 일대의 모습. 일제 강점기 채석장으로 쓰여 돌을 깍아낸 흔적이다. / 한겨레, ‘창신동을 전시합니다’, 2013.6.4.>

동대문 남쪽 신당동에는 일본 사람들이 문화주택을 짓고 정원사나 침모를 두고 호사스런 삶을 누렸다. 청계천 판자촌과 신당동 문화주택은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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